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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트 앙세르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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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는 스위스 출신의 지휘자, 수학자, 작곡가로, 1918년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데카 레코드와의 협업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옹호하고 현대 음악을 적극적으로 연주했으며, 데카 레코드의 스테레오 녹음에 기여했다. 앙세르메는 1969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저술 활동과 여러 작곡가 및 지휘자들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음악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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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트 앙세르메
기본 정보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본명Ernest Alexandre Ansermet
출생1883년 11월 11일, 스위스, 보주, 리비에라-페이-데-아노 지구, 베베
사망1969년 2월 20일, 스위스, 제네바주, 제네바
국적스위스
학력소르본 대학교
직업지휘자
활동 기간1910년 - 1967년
장르클래식 음악
경력
주요 활동발레 뤼스 지휘자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 창립자 겸 상임 지휘자
기타 경력수학 교수
음악적 특징
전문 분야프랑스 근대 음악
러시아 음악
스타일명료하고 객관적인 해석
기타 정보
참고 사항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친밀한 관계 유지
스트라빈스키 작품 초연 지휘
관련 인물이고르 스트라빈스키

2. 생애 및 경력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는 스위스 베베에서 태어나, 로잔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1] 1912년 몽트뢰의 카지노에서 지휘를 시작했고, 1915년부터 1923년까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 지휘자로 활동하며 클로드 드뷔시모리스 라벨을 만나 그들의 작품 연주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만나 러시아 음악과 평생을 함께하게 되었다.[1]

1918년, 앙세르메는 자신의 오케스트라인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OSR)를 창단했다.[2]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순회 공연을 펼쳤으며,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카프리치오'를 작곡가가 직접 솔리스트로 참여하여 초연하는 등 현대 음악을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2] 앙세르메는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재즈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으로, 1919년에는 시드니 베셰를 칭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앙세르메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데카 레코드와의 장기 계약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레퍼토리를 여러 번 녹음했으며, 그의 해석은 명확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널리 평가받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연주는 피에르 몽퇴나 스트라빈스키 자신과 같은 다른 유명 지휘자들에 비해 최고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었다.[3]

앙세르메는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는 것을 싫어했고, 항상 원본 버전을 연주했다.[3] 아르튀르 오네게르프랑크 마르탱 등 다른 작곡가들의 현대 음악을 많이 연주했지만,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의 음악은 피했으며, 스트라빈스키가 12음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비판했다.[3] 앙세르메는 자신의 저서 ''인간 의식 속의 음악의 기초''(1961)에서 에드문트 후설현상학과 자신의 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쇤베르크의 음악 언어가 허위적이고 비합리적임을 증명하려 했다.[4] 그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유대인적인 아이디어"라고 칭하며, 유대인은 "이중으로 잘못된 생각으로 고통받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양 음악의 역사적 창조"는 "유대인 없이도" 잘 발전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4] 이러한 앙세르메의 발언은 나치와의 협력 의혹과 맞물려 전후 그의 평판을 손상시켰고, 이스라엘에서 보이콧을 당하기도 했다.[5]

1954년 5월, 데카 레코드는 유럽 최초의 상업용 스테레오 녹음으로 앙세르메와 오케스트라를 녹음했다.[6] 그들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전곡을 최초로 스테레오 LP 앨범으로 녹음했다. 앙세르메는 클로드 드뷔시의 ''야상곡''과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초기 스테레오 녹음도 지휘했다. 그의 '봄의 제전' 녹음 중 일부는 리허설 녹음과 함께 데카의 스테레오 데모 LP에 사용되었다.[6] 말년에 그는 요제프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녹음했으며, 1962년에는 요제프 하이든''파리'' 교향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1968년 런던에서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였다.[6] 앙세르메는 몇 곡의 피아노 곡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 중에는 'Feuilles de Printemps'(봄의 잎)라는 교향시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또한 1939년에 드뷔시의 '고대 에피그램 6개'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했다.[8] 그는 1969년 2월 20일 제네바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1965)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는 스위스 베베에서 태어났다.[1] 원래 그는 로잔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1910년 몽트뢰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으며, 몽트뢰의 쿠어잘 지휘자가 되었다.

지휘자가 된 앙세르메는 몽트뢰의 카페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만나 친분을 쌓았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스위스에 머물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에게 피에르 몽퇴의 후임 지휘자로 앙세르메를 소개했다. 1915년 앙세르메는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의 제네바 공연 지휘자로 지명되었고, 이후 미국 공연의 지휘자로도 지명되어 전속 지휘자가 되었다.

발레 뤼스에서 앙세르메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광대』, 마누엘 데 파야의 『삼각모자』, 에릭 사티의 『퍼레이드』 등을 초연했다.

2. 2. 지휘자로서의 시작

앙세르메는 로잔 대학교에서 수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12년 몽트뢰의 카지노에서 지휘를 시작했다.[1] 1915년부터 1923년까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클로드 드뷔시모리스 라벨을 만나 그들의 작품 연주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만나 러시아 음악과 평생을 함께하게 되었다.[1]

1910년 몽트뢰에서 지휘자로 데뷔한 앙세르메는 몽트뢰의 쿠어잘 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몽트뢰의 카페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만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스위스에 피신해 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에게 소개되었다. 피에르 몽퇴의 후임을 찾고 있던 디아길레프는 1915년 앙세르메를 러시아 발레단의 제네바 공연 지휘자로 지명했고, 미국 공연 지휘자를 거쳐 전속 지휘자로 삼았다.[1]

앙세르메는 발레 뤼스에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광대』, 마누엘 데 파야의 『삼각모자』, 에릭 사티의 『퍼레이드』 등을 초연했다.[1] 그 외에도 스트라빈스키의 스위스 시대 작품 다수를 초연하고, 프랑크 마르탱아르튀르 오네게르 등 스위스 작곡가들의 작품을 자주 다루었다.

2. 3.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러시아 발레단

1915년부터 1923년까지 앙세르메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프랑스에서 이 활동을 하면서 클로드 드뷔시모리스 라벨을 만나 그들의 작품 연주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1]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만나, 이후 러시아 음악과 평생을 함께하게 되었다.[1]

스트라빈스키는 당시 스위스의 지역 지휘자에 불과했던 앙세르메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스위스로 피신해 있던 디아길레프에게 소개했다. 몽퇴의 후임을 찾고 있던 디아길레프는 1915년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의 제네바 공연 지휘자로 앙세르메를 지명했다. 디아길레프는 앙세르메를 미국 공연 지휘자로도 지명하여 전속 지휘자로 삼았다.

앙세르메가 발레 뤼스에서 초연을 담당한 작품에는 프로코피예프의 『광대』, 파야의 『삼각모자』, 사티의 『퍼레이드』 등이 있다.[1]

2. 4.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창단 및 활동

1918년 앙세르메는 자신의 오케스트라,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OSR)를 창단했다.[2]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순회 공연을 했고, 스트라빈스키의 '카프리치오'를 작곡가가 직접 솔리스트로 참여하여 초연하는 등 어려운 현대 음악을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앙세르메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데카 레코드와의 장기 계약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그 이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레퍼토리를 여러 번, 종종 두세 번씩 녹음했다.[3] 그의 해석은 훌륭하게 명확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널리 여겨졌지만, 오케스트라 연주는 항상 최고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특히 피에르 몽퇴와 스트라빈스키 자신과 같은 20세기 유명 전문가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3]

1954년 5월 데카 레코드는 유럽 최초의 상업용 스테레오 녹음으로 앙세르메와 오케스트라를 녹음했다.[6] 그들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전곡의 최초의 스테레오 공연을 LP 앨범으로 녹음했다.[6] 앙세르메는 또한 클로드 드뷔시의 ''야상곡''과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초기 스테레오 녹음을 지휘했다.[6] 그의 '봄의 제전' 녹음 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리허설 녹음과 함께, 데카가 1957년 스테레오 데모 LP인 '스테레오 사운드로의 여행'에 사용했다.[6] 지휘자의 명확하고 체계적인 박자 세기는 이 리허설 시퀀스의 뚜렷한 특징이다.

말년에 그는 앙상블과 함께 요제프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녹음했다.[6] 1962년, 앙세르메는 데카에서 OSR과 함께 요제프 하이든''파리'' 교향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인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는 1968년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되었으며, 그의 추모로 발매된 리허설 세션 녹음도 포함되었다.[6] 데카를 위한 또 다른 후기 녹음은 L'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알베리크 마냐르의 '교향곡 3번'과 에두아르 랄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케르초'를 다루는 추모 앨범으로 발매되었다.[7]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는 설립 초기에는 재정적으로 불안정했다. 1930년대 초에는 일시 활동 중단에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로잔의 스위스 로망드 방송의 오케스트라를 흡수 합병하여 당시 성장하기 시작한 방송국의 오케스트라로서 재정적으로 안정되자, 활동도 활발해져 브루노 발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카를 슈리히트 등 많은 명지휘자를 객원으로 초빙하게 되었다. 푸르트벵글러는 1944년 1월 17일 로잔, 1월 19일 제네바에서 객원 지휘했다 (후에 스위스로 망명). 카를 슈리히트와는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친교가 있었지만, 앙세르메가 종전 전 해에 그를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를 의뢰하여 독일에서 망명하는 것을 도왔다. 종전 후 수 년 동안 이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가 슈리히트의 주요 활동이 되었다.

전후, 영국의 음반 회사 데카 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은 앙세르메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는, 한때 디아길레프 아래에서 연주했던 발레 음악, 친교가 있었던 모리스 라벨, 알베르 루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등에서 베토벤이나 요하네스 브람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등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에 이르기까지 망라적으로 녹음할 기회를 얻었다. 이들은 앙세르메의 홈 그라운드가 된 제네바의 빅토리아 홀에서 진행되었다. 이 홀에는 녹음을 위한 방이 없어 레스토랑 주방이 컨트롤 룸으로 사용되었다.

방송용 스튜디오는 별도로 스위스 로망드 방송에 있었다. 여기에는 영상 등 앙세르메의 많은 연주가 수록되어 있으며, 방대한 아카이브가 존재한다고 한다. 현재 당 스튜디오는 앙세르메의 이름을 관하고 있다.

영국 데카의 녹음으로 앙세르메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카미유 생상스『오르간 포함』 교향곡아르튀르 오네게르의 『다윗왕』 등은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를 비롯하여 마누엘 데 파야의 발레 음악 등 그들이 세상에 소개하고 널리 알린 음악과 그 연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으면서, 앙세르메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는 일류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또한 앙세르메는 수학자였기 때문에 데카의 스테레오 녹음 시작에도 큰 협력을 했고, 1954년 5월 13일부터 녹음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작곡의 『안타르』는, 동사 최초의 스테레오 실용화 시험 녹음이 되었다. 또한 그 운용에 대해서도 전날 리허설 실험 녹음의 플레이백을 듣고 "나무랄 데 없어. 마치 내가 지휘대에 서 있는 것 같다."라는 앙세르메의 한마디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1967년에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은퇴하고 후임 지휘자로 스위스에 귀화한 작곡가이자 베른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던 파울 클레츠키를 지명했다.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논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앙세르메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데카 레코드와의 장기 계약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레퍼토리를 여러 번 녹음했다. 그의 해석은 명확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널리 평가받았지만, 오케스트라 연주는 피에르 몽퇴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다른 유명 지휘자들에 비해 최고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앙세르메는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는 것을 싫어하여 항상 원본 버전을 연주했다.[3]

아르튀르 오네게르프랑크 마르탱 등 다른 작곡가들의 현대 음악을 많이 연주했지만,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의 음악은 피했으며, 스트라빈스키가 12음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비판했다.[3] 앙세르메는 자신의 저서 ''인간 의식 속의 음악의 기초''(1961)에서 에드문트 후설현상학과 자신의 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쇤베르크의 음악 언어가 허위적이고 비합리적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유대인적인 아이디어"라고 칭하며, 유대인은 "이중으로 잘못된 생각으로 고통받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양 음악의 역사적 창조"는 "유대인 없이도" 잘 발전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4] 이러한 앙세르메의 발언은 나치와의 협력 의혹과 맞물려 전후 그의 평판을 손상시켰고, 이스라엘에서 보이콧을 당하기도 했다.[5]

1954년 5월, 데카 레코드는 유럽 최초의 상업용 스테레오 녹음으로 앙세르메와 오케스트라를 녹음했다. 그들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전곡을 최초로 스테레오 LP 앨범으로 녹음했다. 앙세르메는 클로드 드뷔시의 ''야상곡''과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초기 스테레오 녹음도 지휘했다. 그의 '봄의 제전' 녹음 중 일부는 리허설 녹음과 함께 데카의 스테레오 데모 LP에 사용되었다.[6] 말년에 그는 요제프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녹음했으며, 1962년에는 요제프 하이든''파리'' 교향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1968년 런던에서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였다.[6]

2. 6. 데카 레코드와의 협업과 말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앙세르메와 그의 오케스트라인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OSR)는 데카 레코드와의 장기 계약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그는 자신의 레퍼토리를 여러 번, 종종 두세 번씩 녹음했다. 그의 해석은 훌륭하게 명확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널리 여겨졌지만, 오케스트라 연주는 항상 최고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특히 피에르 몽퇴스트라빈스키 자신과 같은 20세기 유명 전문가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3] 앙세르메는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는 것을 싫어했고 항상 원본 버전을 연주했다.[3] 아르튀르 오네게르프랑크 마르탱과 같은 다른 작곡가들의 현대 음악을 많이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의 음악은 완전히 피했으며,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작품에 12음 음악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비판까지 했다.[3]

1954년 5월 데카 레코드는 유럽 최초의 상업용 스테레오 녹음으로 앙세르메와 오케스트라를 녹음했다. 그들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전곡의 최초의 스테레오 공연을 LP 앨범으로 녹음했다. 앙세르메는 또한 클로드 드뷔시의 ''야상곡''과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초기 스테레오 녹음을 지휘했다. 그의 '봄의 제전' 녹음 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리허설 녹음과 함께, 데카가 1957년 스테레오 데모 LP인 '스테레오 사운드로의 여행'에 사용했다. 지휘자의 명확하고 체계적인 박자 세기는 이 리허설 시퀀스의 뚜렷한 특징이다. 말년에 그는 앙상블과 함께 요제프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녹음했다. 1962년, 앙세르메는 데카에서 OSR과 함께 요제프 하이든''파리'' 교향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인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는 1968년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되었으며, 그의 추모로 발매된 리허설 세션 녹음도 포함되었다.[6] 데카를 위한 또 다른 후기 녹음은 L'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알베리크 마냐르의 '교향곡 3번'과 에두아르 랄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케르초'를 다루는 추모 앨범으로 발매되었다.[7]

앙세르메는 몇 곡의 피아노 곡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 중에는 'Feuilles de Printemps'(봄의 잎)라는 교향시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또한 1939년에 드뷔시의 '고대 에피그램 6개'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했다.[8]

그는 1969년 2월 20일 제네바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음악의 벗 출판사 간행 『세계의 오케스트라 123』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항목에서는 "오랫동안 강렬한 개성을 가진 지휘자에게 이끌린 오케스트라는 종종 후임으로 반대 성격의 지휘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데카사에서 많은 음반이 발매되었으며, 이후 CD화된 것도 많이 존재한다. 데카의 음반이 킹 레코드와 폴리도르에서 병행 발매되던 1990년대 이전에는 주로 킹 레코드에서 음반이 발매되었다.

3. 음악적 업적 및 평가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는 20세기 초, 클래식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친 지휘자이자 음악 이론가였다. 그는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OSR)를 창단하여 50년 가까이 이끌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등 당대 주요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하고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 지휘자로 활동하며 스트라빈스키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그의 많은 작품을 초연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위스로 망명 온 스트라빈스키와 교류하며 그의 음악 세계에 깊이 관여했다.

앙세르메는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데카 레코드에서 방대한 양의 음반을 녹음했다. 특히, 1954년에는 유럽 최초의 상업용 스테레오 음반을 녹음하는 등 음반 기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몇 곡의 피아노 곡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 중에는 'Feuilles de Printemps'(봄의 잎)라는 교향시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에는 드뷔시의 '고대 에피그램 6개'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했다.[8]

앙세르메의 주요 초연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곡가작품명초연 장소 및 날짜
스트라빈스키병사의 이야기로잔 1918년 9월 28일
스트라빈스키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카프리치오작곡가 본인 독주, 1929년 12월 6일
스트라빈스키미사1948년 10월 27일
파야삼각모자발레 뤼스, 파리, 1919년 (레오니드 마신 안무, 파블로 피카소 무대 및 의상 디자인)
스트라빈스키풀치넬라발레 뤼스, 파리, 1920년 5월 15일
프로코피예프추트발레 뤼스, 파리, 1921년
스트라빈스키레나드발레 뤼스, 파리, 1922년 5월 18일
스트라빈스키결혼발레 뤼스, 파리, 1923년 6월 13일
벤자민 브리튼루크레티아의 능욕글라인드본, 1946년 7월 12일
스트라빈스키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작곡가(스트라빈스키)가 솔리스트, 1930년 5월


3. 1. 현대 음악의 옹호

앙세르메는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재즈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으로, 1919년에는 시드니 베셰를 칭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2] 그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는 것을 싫어했고 항상 원본 버전을 연주했다.[3] 아르튀르 오네게르프랑크 마르탱 등 다른 작곡가들의 현대 음악을 많이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의 음악은 완전히 피했으며,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작품에 12음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비판까지 했다.[3]

앙세르메는 자신의 저서 ''인간 의식 속의 음악의 기초''(1961)에서 에드문트 후설현상학과 자신의 수학적 연구를 사용하여 쇤베르크의 언어가 허위적이고 비합리적임을 증명하려 했다.[4] 그는 이를 "유대인적인 아이디어"라고 칭하며 "유대인은 '나'인 척하며 말하는 '나'이며", 유대인은 "이중으로 잘못된 생각으로 고통받는다"고 말하며, 따라서 그는 "돈을 다루기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또한 "서양 음악의 역사적 창조"는 "유대인 없이도" 잘 발전했을 것이라는 진술로 결론을 내렸다.[4] 이러한 앙세르메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은 나치와의 협력과 맞물려 전후 그의 평판을 손상시켰고, 이스라엘에서 보이콧을 당하기도 했다.[5]

3. 2. 정확하고 권위 있는 해석

앙세르메는 스위스 베베에서 태어났다.[1] 원래 로잔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으며, 1912년 몽트뢰의 카지노에서 지휘를 시작했다. 1915년부터 1923년까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클로드 드뷔시모리스 라벨을 만나 작품 연주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만나 러시아 음악과 평생을 함께하게 되었다.[1]

1918년, 앙세르메는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OSR)를 창단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순회 공연을 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카프리치오' 초연 등 현대 음악을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앙세르메는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재즈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으로, 1919년에는 시드니 베셰를 칭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앙세르메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데카 레코드와의 장기 계약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레퍼토리를 여러 번 녹음했는데, 그의 해석은 훌륭하게 명확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널리 여겨졌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연주는 피에르 몽퇴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20세기 유명 전문가들과 비교하면 항상 최고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3]

앙세르메는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는 것을 싫어했고 항상 원본 버전을 연주했다. 아르튀르 오네게르프랑크 마르탱과 같은 다른 작곡가들의 현대 음악을 많이 연주했지만,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의 음악은 피했으며, 스트라빈스키가 12음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는 비판했다.[3] 앙세르메는 저서 ''인간 의식 속의 음악의 기초''(1961)에서 에드문트 후설현상학 등을 사용하여 쇤베르크의 음악이 허위적이고 비합리적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유대인적인 아이디어"라고 칭하며, 유대인은 "돈을 다루기에 적합하다"고 말하고, "서양 음악의 역사적 창조"는 "유대인 없이도" 잘 발전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4] 이러한 앙세르메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은 나치와의 협력과 함께 전후 그의 평판을 손상시켰고, 이스라엘에서 보이콧을 당하기도 했다.[5]

앙세르메는 수학자였기 때문에 데카의 스테레오 녹음 시작에도 큰 협력을 했다. 1954년 5월 13일부터 녹음된 림스키코르사코프 작곡의 『안타르』는, 데카 최초의 스테레오 실용화 시험 녹음이 되었다. 또한 그 운용에 대해서도 전날 리허설 실험 녹음의 플레이백을 듣고 "나무랄 데 없어. 마치 내가 지휘대에 서 있는 것 같다."라는 앙세르메의 한마디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앙세르메는 자허 등과 함께 동시대 작곡가들과 친교를 맺고 그 음악의 보급에 힘썼지만, 쇤베르크 등의 12음 음악과 바레즈와 같은 전위적인 음악, 무조 음악은 포함되지 않았다. 작곡가이기도 했던 앙세르메는 저서 『인간의 지각에 있어서 음악의 원리』(1961년)에서 쇤베르크의 음악 어법이 잘못되어 불합리하다고 증명하려 시도했다. 다만 이 저서의 현대 음악에 관한 주요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비판에 할애되어 있다.

스트라빈스키와는 오랜 친구였지만 1937년 『카드놀이』의 스위스 공연에서 앙세르메가 컷을 요구한 것을 계기로 격렬하게 대립하여 10년 정도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었다. 더 나아가 스트라빈스키가 12음 기법을 사용하여 작곡하게 되자 마침내 절교에 이르렀다. 1966년 뉴욕 필하모닉 주최의 스트라빈스키 페스티벌에 출연한 앙세르메는 "싸우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라고 말하며 관계 회복을 원했지만, 그 연주회에 스트라빈스키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3. 3. 음반 녹음과 스테레오 기술 기여

1954년 5월, 데카 레코드는 유럽 최초의 상업용 스테레오 녹음을 앙세르메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OSR)를 통해 진행했다.[6] 이들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전곡을 최초로 스테레오 LP 앨범으로 녹음했다.[6] (이전 아르투르 로진스키가 스테레오로 녹음했지만 모노 LP로만 발매되었다.)[6] 앙세르메는 클로드 드뷔시의 ''야상곡''과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초기 스테레오 녹음도 지휘했다.[6] 그의 '봄의 제전' 녹음 중 일부는 리허설 녹음과 함께 데카의 1957년 스테레오 데모 LP인 '스테레오 사운드로의 여행'에 사용되었다.[6]

말년에 앙세르메는 요제프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녹음했다.[6] 1962년에는 데카에서 OSR과 함께 요제프 하이든''파리'' 교향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했다.[6]

그의 마지막 녹음은 1968년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였다.[6] 이 녹음에는 리허설 세션 녹음도 포함되어 추모 앨범으로 발매되었다.[6] 데카를 위한 또 다른 후기 녹음은 알베리크 마냐르의 '교향곡 3번'과 에두아르 랄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케르초'를 다룬 추모 앨범이었다.[7]

앙세르메는 수학자였기 때문에 데카의 스테레오 녹음 시작에 큰 협력을 했다.[6] 1954년 5월 13일부터 녹음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안타르''는 데카 최초의 스테레오 실용화 시험 녹음이었다.[6]

3. 4. 주요 초연 작품

작곡가작품명초연 장소 및 날짜
스트라빈스키병사의 이야기로잔 1918년 9월 28일
스트라빈스키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카프리치오작곡가 본인 독주, 1929년 12월 6일
스트라빈스키미사1948년 10월 27일
파야삼각모자발레 뤼스, 파리, 1919년 (레오니드 마신 안무, 파블로 피카소 무대 및 의상 디자인)
스트라빈스키풀치넬라발레 뤼스, 파리, 1920년 5월 15일
프로코피예프추트발레 뤼스, 파리, 1921년
스트라빈스키레나드발레 뤼스, 파리, 1922년 5월 18일
스트라빈스키결혼발레 뤼스, 파리, 1923년 6월 13일
벤자민 브리튼루크레티아의 능욕글라인드본, 1946년 7월 12일
스트라빈스키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작곡가(스트라빈스키)가 솔리스트, 1930년 5월


4. 저술 활동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61년에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인간 의식 속의 음악의 기초》(Les fondements de la musique dans la conscience humaine)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7년에 장-클로드 피게와 로즈-마리 팔러-포코넷 등의 편집을 거쳐 새로운 판으로 출간되었다.[1] 1973년에는 《20세기 음악에 대한 파울 힌데미트의 기여》라는 글을 통해 파울 힌데미트의 음악 세계를 조명하기도 했다.[2] 또한, 1983년에는 장-클로드 피게의 편집으로 앙세르메의 음악에 관한 글들을 모은 《음악에 관한 글》(Ecrits sur la musique)이 출간되었다.[3]

5. 서신 교환

앙세르메와 빌헬름 켐프 (1965)

  •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프랑크 마르탱: 서신, 1934–1968프랑스어 - 장-클로드 피게 편집, 자크 부르데 노트, 1976, 뇌샤텔: 라 바코니에르.
  •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미국 작곡가들과의 서신 (1926–1966): 아론 코플랜드에서 버질 톰슨까지, 신세계의 거장들프랑스어 - 클로드 타폴레 편집, 2006, 제네바: 게오르그.
  •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유명 지휘자들과의 서신 (1913–1969):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추억 (1967)이 앞서 있다프랑스어 - 클로드 타폴레 편집, 1999, 제네바: 게오르그.
  • E. 앙세르메 - J.-클로드 피게 서신 (1948–1969) 프랑스어 - 필리프 딩켈 서문, 장-자크 랑겐도르프 후문, 클로드 타폴레 편집, 1998, 제네바: 게오르그 에디터.
  • 앙세르메-스트라빈스키 서신 (1914–1967)프랑스어 - 클로드 타폴레 편집, 1990–91, 제네바, 스위스: 게오르그.
  • 앙세르메-라뮈 서신, 1906–1941프랑스어 - 모리스 체르마트텐 서문, 클로드 타폴레 편집, 1989a, 제네바: 게오르그; 파리: 에셸.
  • 스위스 작곡가들이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에게 보낸 편지, 1906–1963프랑스어 - 콘라드 벡 서문; 줄리앙-프랑수아 스빈덴 후문, 클로드 타폴레 편집, 1989b, 제네바: 게오르그.
  •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R.-알로이스 무서 서신: 1915–1969. 뮌헨 여행 (1924)이 앞서 있고 R.-알로이스 무서의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에 대한 찬사 (1969)가 뒤따른다프랑스어 - 르네 도바즈 서문, 클로드 타폴레 편집, 1983, 제네바: 게오르그.

참조

[1] 백과사전 Ansermet, Ernest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1992
[2] 간행물 Sur un orchestre nègre 1919-10-01
[3] 논문 The Tonal and the Foundational: Ansermet on Stravinsky Blackwell Publishing 1984-06-01
[4] 서적 The Apollonian Clockwork: On Stravinsky https://books.google[...]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17-01-14
[5] 서적 The Ring of Myths: The Israelis, Wagner and the Nazis https://books.google[...] Sussex Academic Press 2017-01-14
[6] 뉴스 Exploring the Legacy of Ansermet https://www.nytimes.[...] 2017-08-19
[7] 웹사이트 Ansermet Memorial Album: Magnard; Symphony # 3 / Lalo; Scherzo for Orchestra: Alberic Magnard, Edouard Lalo, Ernest Ansermet, Suisse Romande: Music https://www.amazon.c[...] 2013-07-02
[8] 학위논문 Between the Staves https://digital.libr[...] 2007-12
[9] 뉴스 Died http://www.time.com/[...] 2011-01-03
[10] 문서 しかし、ヴィクトリア・ホールは1980年代に火災に遭い、オルガンなどを焼失した。
[11] 문서 同音源は現在ユニバーサルミュージック (日本)|日本のユニバーサルミュージックからCD番号:UCCD-6035にて発売されている。また、同CDのライナーノーツには、この時の実用化試験録音開始に際して、当時録音を担当をしていたロイ・ウォーレスによる文が掲載されている。なお、この曲を含む少なくともLP3枚分の録音セッションは、翌月初めまで続いたものの、それらの録音について各曲の詳細な録音日のデータは残っていないため、デッカではそれらを全て「1954年6月録音」と表示している。
[12] 문서 前記の録音を入れたCD(CD番号:UCCD-6035)の解説書中の、当時録音を担当をしていたロイ・ウォーレスによる文の中にその模様が記載されている。
[13] 서적 作曲家別 名曲解説ライブラリー25 ストラヴィンスキー 音楽之友社
[14] 서적 Stravinsky: The Second Exile: France and America, 1934-1971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5] 서적 指揮者の光芒 洋泉社
[16] 서적 クラシック不滅の巨匠たち 音楽之友社
[17] 백과사전 Ansermet, Ernest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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